[리뷰] 부르주아 생리학



페이퍼로드 출판사의 "부르주아 생리학(앙리 모니에 저/김지현 역)"를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표지


부르주아에 의해 쓰여진 부르주아를 풍자하는 불문학 작품으로, 1800년대 당시의 프랑스 시대상과 브루주아의 모순된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책 제목으로 사용된 두 단어 부르주아와 생리학은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단어이다. 부르주아는 주로 우리시대의 한국인에게는 분단의 현실과 맞물려 마르크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인식하기 쉽다. 생리학이란 단어는 더욱 생소하다. 오늘날처럼 과학이 발전한 시기에는 그저 의학의 한 분야로 인식되는 것이 한계인 것 같다.

다행히도 본 작품의 역자가 서문에 두 단어에 대한 정의를 당시 시대 상황에 비추어 간략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이는 당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는 쉽게 음미할 수 없는 단어이기에 역자의 배려에 감사할 뿐이다.

생리학은 당시 과학 수준이 지금보다 뒤떨어져 있고 정립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인간의 조직과 생리가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 분위기 속에 문학 장르로 파생된 개념으로 이해했다. 즉, 이 작품에서는 부르주아라는 속물들이 사회와 주고 받는 상호작용을 표현하기 위한 단어로 사용된 것이 아닌가 싶다.

부르주아란 원래 도시를 가리키는 ‘부르(bourg)’에서 파생된 ‘성(城) 안 사람’이란 의미이다. 부르주아는 왕이나 성주와 달리 실질적 활동의 주체로 이 세계의 상업적이나 지적인 면에서 진보의 주체였기에 프랑스 혁명 - 혹은 일각에서는 부르주아 혁명으로도 불린다. - 을 일으킨 주체로 평가받기도 한다. 반면 스스로의 기득권을 고수하고자 애쓰고 귀족의 권력을 흠모하는 현상이 있었기에 이들의 허위 의식을 비판하고 풍자했던 것 또한 당시 시대적 배경 중 하나인 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역사에 관심이 많아 현 시점 부의 양극화 문제의 원류를 찾다 프랑스 혁명을 조금 깊게 분석해 본 적이 있는데 인간의 솔직한 추악한 본성을 느끼며 씁쓸해 했던 기억이 있다. 특히 프랑스의 근대화와 관련된 일련의 과정 중 6월 봉기야 말로 부르주아 계층의 추악함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 부르주아를 대표로한 중소 시민층이 자신들이 원하는 투표권, 자산 등에 대한 권리를 얻었을 때 재빨리 기득권의 층에 합류하여 질서유지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그 현상은 지금도 지속되며 아니, 오히려 심화되었으며 그 증거로 크게는 상위 1%도 안되는 이가 전세계 50%에 가까운 부를 차지하는 부의 양극화 문제에서 부터 작게는 우리나라의 강남 사교육 열풍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어느 정도 비율로 섞어야 정확한 정답이 나오는지 혹은 또 다른 대안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문의 깊이가 얕고 사상적인 문제 혹은 정치적인 문제에 큰 관심을 두는 사람이 아닌지라 본 리뷰를 이념 문제로 풀 능력도 의지도 없다. 다만 당시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비롯된 부르주아의 모순이 당시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좋은 안주거리였음을 설명하고자 견해를 피력해 보았다.

사상 문제를 걷어내고 나면 본 도서에 흥미로운 점은 두 가지로 압축될 듯 하다. 하나는 당시 부르주아들의 치졸한 삶을 엿보고 풍자하며 문학 작품을 감상하는 일. 다른 하나는 1800년대의 프랑스를 간접 체험하는 일이 아닐런지.

당시 민중들에 모순적으로 비춰졌던 부르주아는 본 작품에 등장하는 행동 또한 모순적이기 짝이 없다. 겉으로는 부유하고 스스로는 귀족처럼 위대하고 권위있기를 바라지만 실상 머리에 든 것은 별로 없어 허례의식에 집착하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행동에 누구보다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 가장 잘 표현한 부분은 개인적으로 “제13장. 부르주아의 저녁 초대” 혹은 “제5장. 초상肖像에의 열광과 예술가와의 친분” 부분에서 가장 잘 와닿았다. 스스로의 자화상을 그리는데 비싼 돈을 지불하는 것은 물론 자신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그리기 보다는 본 모습보다 멋지고 우아한 형태의 그림으로 남기길 원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자화상

더욱이 그들의 자화상을 후에 누가 원할런지 모르겠지만 오늘날 포토샵 처리하듯 스스로의 모습을 가꾸려고 시도하는 행위가 어떤 의미로 남을까? 수십 점에 이르는 스스로의 자화상을 후대에 누가 소유하고 싶은지 알긴 하는건지 막연히 믿는건지 거짓된 본인의 모습의 작품을 그렇게 많이 남기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마치 삶의 가치를 찾기 못한 채 방황하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도 든다.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의 저녁 초대는 몇 주 전부터 요란스럽게 준비해야하는 작업으로 본인은 물론 아내 그리고 하인에 이르기까지 온 집안이 예민해지고 스트레스를 받는 문화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치레와 허영으로 남들 눈에 스스로 비춰지고 싶은 모습이 있었던 걸까? 유명 인사들을 집으로 초대하는 일을 포기하지 못한다.

더불어 앞서 언급한 대로 당시 프랑스의 시대상을 간접 체험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를 가져다 준다. 특히 배심원 제도의 시초가 프랑스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점이 놀라웠다. 당시의 배심원 제도는 부르주아 만큼이나 모순적인 양면성을 띄고 있는데 다행이 오늘날에는 상대적으로 배심원의 순수한 취지만 남아 있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당시에는 좀도둑질과 같은 경범죄에는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고, 살인과 같은 중범죄에는 정상 참작이 적용된다는 것이 아이러니 하다. 별 것 아닌것 같아도 인간이 얼마나 스스로의 욕심에 의해 행동하는지 깊게 생각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경범죄는 자신들의 담배나 돈이 도둑질 당할 가능성이 있어 엄격했고, 중범죄는 사형 선고 등으로 죄를 짓는 것 같은 마음의 무거움 때문에 처결을 가볍게 내렸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부르주아 저녁초대 파트에서도 재미있는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아내에게 꼼짝못해 쩔쩔매는 남편의 모습, 결코 쉽지 않은 가사와 육아의 동시 진행 등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지리적으로,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당시 프랑스도 오늘날과 별 반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나는 비록 수준이 낮아 저자가 작품에 담으려는 메시지를 모두 이해하진 못한 것 같다. 물론 불문학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준 높은 교양과 불문학에 대한 경험 및 지식이 필요할 것이고 당시 시대적 배경과 문화를 숙지함은 물론 불어 자체가 담고 있는 언어적 해박함도 필요할 것이다.

다만 역자분께서 정성들여 한국의 정취를 가미하여 주셨기에 아스라이 저자의 메시지를 짐작할 뿐이다. 그럼에도 부르주아의 모순적 행동, 당시 프랑스 문화의 간접체험, 풍자의 해학 그리고 사람의 본성에 대한 고찰만으로도 충분히 본 도서를 느끼고 즐길 수 있음을 알리고 싶어 서평을 남긴다. 보다 많은 배경과 문학적 소양을 가진 독자분이 더 좋은 리뷰를 남기고 이를 바탕으로 나의 문학적 식견을 끌어올리길 바라며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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